말레이시아 땅을 처음 밟았을 때 훅 치고 들어오던 덥고 습한 공기,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낯선 현지 문화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국에서의 빠르고 치열한 삶에만 익숙해져 있던 저에게 이곳의 일상은 그야말로 '문화 충격' 그 자체였죠. 하지만 어느덧 이곳에서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던 일들이 이제는 없으면 서운할 만큼 제 삶의 일부로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나는 여기가 이렇게 오래 내 집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모든 게 '불편함'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것들이 없으면 오히려 허전한, 내 일상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걸 느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말레이시아 이민, 유학, 혹은 한 달 살기를 준비하시는 분들을 위해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진짜 현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해요.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알고 나면 이 나라를 더욱 깊이 사랑하게 만드는 세 가지 문화를 제 생생한 경험담과 함께 소개해 드립니다
시간은 '정시'가 아니라 '도착하면 시작'이다 — Jam Karet(고무 시간)
"2시에 만나자"가 2시 30분을 의미하는 나라에서 20년을 살아온 이야기
이것이 바로 말레이시아(사실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남아 전반)에서 말하는 'Jam Karet', 직역하면 '고무 시간'이다. 시간이 고무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는 뜻이다. 약속 시간은 '목표치'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특히 더 황당했었던 문화 적응기는 회사 동료나 로컬 친구들의 결혼 초대를 받았을때 일들이다.
"결혼식 초대장에 '오후 7시'라고 적혀 있으면, 신랑 신부는 8시 30분에 입장한다. 나도 처음엔 7시에 도착해서 1시간 반을 식장 연회장 앉아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기다리고 있었다. 뭐 물론 식전행사에 따른 사진찍기, 커다란 화면에 결혼사진 틀어줘서 보여주기, 다른 지인들과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하기 등등 하면서 기다리는 시간들이다. 지금은 초대장을 받으면 자동으로 '30분에서 1시간 더하기'를 계산해서 결혼식 장소에 도착하곤 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너무 늦게 가지는 않는.다"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 문화를 '느리다'고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 중심'이라고 부른다.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는 사람과의 대화, 그 자리의 분위기가 시계보다 중요하다는 나름의 의미들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비즈니스 미팅에서는 여전히 답답할 때도 있다. 하지만 주말 오후 친구들과 코피티암에서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다 보면, 나도 어느새 시계를 안 보고 있다.
말레이시아 친구와 만날 때는 처음부터 '말레이시아 시간'으로 계산하자. 공식 비즈니스 자리나 정부 기관 업무는 예외적으로 시간을 잘 지킨다.
밤은 길고 이야기는 끝이 없다, '마막(Mamak)' 문화
두 번째는 바로 말레이시아의 독특한 야식 및 소통 문화인 ‘마막(Mamak)’입니다. 마막은 인도계 무슬림들이 운영하는 24시간 식당을 뜻하는데요, 처음 이곳을 봤을 때는 늦은 밤 길가에 플라스틱 의자를 깔고 앉아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며 무척 신기해했습니다.
저렴하고 맛있는 소울 푸드: 떼따릭(Teh Tarik, 달달한 밀크티) 한 잔과 로띠 짜나이(Roti Canai, 얇고 바삭한 인도식 부침빵)는 그야말로 환상의 짝꿍입니다. 이천원 정도면 훌륭한 야식과 달콤한 차를 즐길 수 있죠.
모두의 사랑방: 마막은 단순한 식당이 아닙니다. 스포츠 경기가 있는 날이면 커다란 스크린 앞에 수십 명이 모여 함께 환호하고, 친구들과는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떠는 소통과 교류의 장 역할을 합니다. 예전에 2005년경 한국의 박지성 선수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줄임말 맨유)에 입단했을때 대단했죠. 여기 말레이시아는 자국 축구리그도 인기이지만, 역사적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엄청 인기가 많습니다. 또 각자가 서포트하는 클럽이 제각각 다 달라서 서로 약간의 말다툼도 생기곤 하는데, 맨유에 입단한 박지성 선수 때문에 약간 어깨뽕 된 순간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아시아 최초 잉글랜드 그당시 최고의 인기 클럽 맨유에 입단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친구들고 주말에 아스트로 (ASTRO) 위성중계 프리미어 리그 보러 마막에 정말로 자주 갔었습니다.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일상: 늦은 밤, 출출하거나 잠이 오지 않을 때 동네 마막에 슬리퍼를 끌고 나가 떼따릭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이제 제게 가장 확실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되었습니다.
밥상 위의 평화 협정 — 말레이시아식 식사 문화와 할랄·비할랄의 공존
말레이, 중국계, 인도계가 한 식탁에 앉는 방법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 중 하나는, 세 민족(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이 각자 전혀 다른 음식 금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일 같은 호커센터에서 밥을 먹는다는 사실이다. 무슬림인 말레이계 친구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힌두교를 믿는 인도계 친구는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런데 이걸 두고 서로 불편해하거나 갈등이 생기는 경우를 나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비결은 단순했다. 각자 자기가 먹을 수 있는 걸 주문하면 된다. 한국에서 왔을 때 나는 '함께 먹는다'는 게 같은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함께 먹는다'는 건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음식을 먹으며 같은 시간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 말레이 동료 집에 초대받았을 때, 나는 '할랄 음식만 준비되어 있겠지' 생각하고 갔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당신을 위해 할랄음식이 아닌 음식도 테이크아웃으로 시켜놨어요'라고 했다. 그게 이 나라의 방식이었다. 배려는 있는 문화다." 물론 처음에는 할랄음식에 적으하면서 맛있게 먹고 말레이계 분들의 식문화인 오른손으로 숟가락/젓가락 없이 식사도 하곤 했다. 물론 손으로 식사를 한다는것이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어려웠지만 말레이시아식 식문화를 이해하는데는 좋았다.
20년을 넘게 살면서 나도 모르게 이 문화가 몸에 배었다. 이제 나는 다민족 그룹과 밥을 먹으러 갈 때 자연스럽게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식당을 물색한다. "할랄이야?", "돼지고기 없지?"를 체크하는 것이 번거로움이 아니라 당연한 예의가 됐다. 그리고 그게 오히려 더 넓은 세계를 맛볼 수 있게 해줬다.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배우는 중입니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불편하기만 했던 것들이, 어느새 내 삶의 한 부분이 됐다. 느슨한 시간 감각, 다양한 문화가 한 식탁 위에 공존하는 방식, 저녁에 마막에서 즐기는 태도. 이 세 가지는 단순히 '말레이시아 문화'가 아니라, 내가 20여년 동안 이 땅에서 배운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말레이시아는 여전히 나를 가르친다. 아직도 매주 뭔가 새롭게 발견하고, 가끔은 여전히 당황하기도 한다. 그게 이 나라의 매력인 것 같다. 앞으로도 내가 직접 겪고 느낀 말레이시아의 리얼한 이야기들을 계속 나눠볼 예정이다.

